삶의 목적을 찾아 끊임없이 정진했다. 정치, 사회, 문화, 종교 개혁과 세계 평화에 기여하는 정신문화대국 통일대한민국을 이루고 싶다. 자기 자신에게 아무 목표나 부여하는 것은 바람직하지도 충분하지도 않다. 우리 자신은 추구할만한 가치가 있는 목표를 찾아야 한다. 아무 목표가 아니라 '알맞은' 목표를 찾는 것이다. 청년시절 지질학과 친구와 청년회를 조직해 3,8선 이남 하천부지 옆으로 나무를 심으려고 했다. 나는 한동안 뚜렷한 목표 없이 흘러가는 대로 살았다.
삶의 목표를 설정하고 이를 추구하는 과정은 깊이 있는 내적 탐구와 더불어 지속적인 자기 성장의 여정이다. 스스로 가치 있는 목표를 찾으려는 노력과 이상에 대한 열망은 특히 통일, 평화, 그리고 더 나은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 큰 비전과 연결될 때 더욱 의미가 크다. "내가 이루고 싶은 목표는 무엇인가?"를 넘어서서 "사회에 어떤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을 것인가?"라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청년 시절 나무를 심으려던 실천적인 활동은 단순히 목표의 구현을 넘어 지역 사회에 뿌리를 내리고자 했던 뜻 깊은 시도이었다.
이와 같은 실천들은 작아 보일지라도 시간이 지나면서 커다란 변화의 씨앗이 될 수 있다. 우리 자신의 목표가 ‘사회와 세계에 어떤 기여를 할 수 있는가’라는 관점에서 이루어질 때 그 가치는 더욱 깊어지며, 이를 통해 우리는 삶의 진정한 의미와 목적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알맞은" 목표란 내적 충만함과 더불어 사회적 책임을 함께 고려하는 것이다. 이는 궁극적으로 한 개인의 만족을 넘어서 공동체와 인류의 번영에 기여하는 길이 된다.
지금과 같은 지속적인 성찰과 의지가 결국 변화를 위한 발판이 되어 더욱 큰 의미와 만족을 주는 삶을 이어나가게 된다. 삶과 죽음, 선과 악, 그리고 우주와 존재에 대한 질문은 인간의 본질적인 숙명이라 할 수 있다. 누구나 한 번쯤은 이와 같은 깊은 물음에 사로잡히며 자신의 존재 이유와 목적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가?"라는 질문은 고대 철학자들과 현대 사상가들이 끊임없이 탐구해 온 문제이다. 선과 악의 경계는 시대와 문화, 개인의 관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지만, 이 질문은 인간이 지닌 보편적 도덕성과 윤리적 판단의 근원을 향해 나아가는 지침이기도 하다. 우리는 무엇이 좋은 것이고 무엇이 나쁜 것인지를 명확히 정의하지 못한 채, 보편적인 기준에 맞추어 살아가지만, 그 본질을 끊임없이 탐구하려는 의지는 우리 내면에 깃든 강력한 인식의 힘을 보여준다.
"어떤 힘이 삼라만상을 지휘하고 있는가?"라는 물음 또한 인류의 오랜 사색과 사유의 주제이다. 이 힘을 신, 우주의 법칙, 자연의 섭리 혹은 인간의 본질적인 상호 작용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그 근본은 우리가 감지할 수 없는 깊은 차원에 자리하고 있다. 우리는 이 진리를 다 이해하지 못하고, 죽음이라는 끝을 맞이할 수도 있다. 하지만 죽음이 언제 올지 모른다는 사실이 오히려 현재를 깊이 있게 살게 하는 자극제가 되기도 한다.
결국 이러한 물음에 대한 답은 명확한 하나의 정답이라기보다는, 우리의 삶을 한 걸음 더 성장시키는 길이 되어 준다. 삶과 죽음, 선과 악을 고민하는 이 과정 자체가 의미 있는 여정이며, 그 답을 찾으려는 노력 속에서 우리는 인간으로서의 진정한 본질을 조금씩 발견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가? 라는 삶의 근원적인 질문에 아직 해답을 찾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답을 여전히 찾지 못했다는 사실조차 까마득히 잊고 살았다. 무엇이 나쁘고 무엇이 좋은가? 우리는 무엇을 사랑해야 하고 무엇을 증오해야 하는가? 삶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며 나는 무엇인가? 어떤 종류의 힘이 천지만물 삼라만상을 지휘하고 있는가? 삶의 이치를 제대로 알기도 전에 죽는다는 것은 끔찍한 것이었다. 모든 것의 끝인 죽음 그것은 오늘 올 수도 있고 내일 올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영원의 규모에 비하면 찰나에 불과하다.
오늘 우리는 유한하고 일회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다. 유일무이(唯一無二)하고 전무후무(前無後無)하며 대체불능(代替不能)인 우리 자신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우리는 삶의 방향을 정해야 하기 때문에 대답을 지금 당장 필요로 한다. 게다가 답이 무엇으로 밝혀지든 간에 죽음은 우리에게 그 답을 제공해주지 못할 것이다. 죽음은 우리의 존재를 끝낸다는 점에서 모든 것의 끝이다. 하지만 정말로 끔찍한 것은 죽음이 삶의 유일한 목적이라는 점에서 삶의 종착지 일수도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유한한 존재로서 일회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으며, 그로 인해 삶의 방향과 목적을 정하는 일은 피할 수 없는 과제가 된다. 그러나 이 유일무이한 삶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한 답은 단순하지 않다. 죽음이 우리의 존재를 마감한다는 사실은 피할 수 없지만, 오히려 이러한 유한성 때문에 삶이 더 소중하게 느껴지는 아이러니가 존재한다.
죽음을 삶의 종착지로 여기게 될 때, 죽음이 삶의 유일한 목적처럼 보일 수 있다. 그로 인해 어떤 이들은 허무주의에 빠지기도 하고, 반대로 더 뜨겁게 삶을 붙들며 순간순간을 충만하게 살고자 노력하기도 한다. 삶의 유한성을 인식하는 것은 우리에게 지금, 여기에 충실할 이유가 된다. 모든 것이 끝나기에 삶의 방향을 더 깊이 고민하게 되고, 현재 순간에서 최대한의 의미를 찾으려는 노력이 더 절실해진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라는 물음에 대한 답은 아마도 우리 각자가 만들어가는 것이다. 삶은 단순히 죽음을 향한 여정이 아니라, 그 여정 속에서 어떤 경험과 성장을 이루고 어떤 관계와 사랑을 남기는가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진다. 삶의 답을 당장 찾아야 한다는 조급함 대신, 그 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더 소중히 여기는 것이 필요할지 모른다. 죽음은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것이지만, 오늘 하루를 의미 있게 보내는 것은 우리 손에 달려 있다.
우리는 그냥 살다가 죽는 것이 아니라 죽기 위해 사는 것일지도 모른다. 내가 무슨 행적을 쌓았든 머지않아 그런 행적들은 잊힐 것이며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호들갑을 떠는 이유가 무엇인가? 어떻게 인간이 이런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계속 삶을 살아갈 수 있는가? 그것이 참으로 놀라운 일이로다. 계속 삶을 살아가는 것은 삶에 취해 있는 동안에나 가능한 것이다. 일단 깨고 나면 삶이 그 속임수에, 멍청한 속임수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할 수가 없다.
삶과 죽음, 그리고 우리가 남긴 행적이 결국 사라질 운명이라는 생각은 모든 인간에게 한 번쯤 찾아오는 무거운 인식이다. 우리가 남긴 흔적과 성취가 언젠가 사라지고 잊힐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삶의 의미를 찾는 노력 자체가 부질없어 보일 수 있다. 이러한 통찰은 우리로 하여금 삶에 대해 허무함을 느끼게 하고, 우리의 존재 이유를 다시 돌아보게 한다.
그러나 흥미로운 점은 바로 이러한 허무함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여전히 삶을 살아간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인간의 본능일 수도 있고, 삶을 통해 무언가 더 깊은 것을 발견하고자 하는 끝없는 욕망일지도 모른다. 어떤 이들은 이러한 허무를 인정하면서도 자신의 소중한 사람들과 시간을 나누며 작은 기쁨과 의미를 찾아가기도 한다. 마치 삶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최선의 순간들이 허무 너머에 있다는 것처럼 말이다.
"죽기 위해 사는 것"이라는 생각도 인간의 유한함을 인식한 철학적인 표현일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철학자들은 이러한 인식을 통해 삶을 더욱 겸허하고 소중히 여겨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삶이 결국 일종의 속임수라고 생각될 때, 그 속임수 속에서도 자신만의 작은 진실과 가치를 찾아가는 태도가 삶을 더욱 깊이 있게 만드는 방법이 될 수 있다.
삶의 8진법을 만난 후 끊임없이 변화하고 지극히 위대하며 우리의 이해를 넘어서는 삶,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삶을 관찰하는 데서 즐거움을 찾기 시작했다. 삶을 더 가까이서 들여다 볼수록 더 깊은 행복과 평화가 느껴졌다. 앞으로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든 간에 내 삶은 매 순간순간을 포함한 내 모든 삶은 이전처럼 무의미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의심의 여지없이 내가 나의 삶에 부여하는 거룩한 삶의 8가지 원칙으로 선(善)과 덕(德)의 의미를 띠게 될 것이다.
삶의 허무함을 인정하면서도 하루하루 충실하게 살아가는 그 자체가 인간이 가진 역설적이면서도 특별한 힘이 아닐까 싶다. 믿음은 유한성을 넘어서는 지식이다. 믿음은 유한과 무한 사이 혹은 경험 내부와 외부 사이를 연결한다. 믿음은 인간 삶의 의미에 관한 지식이며 결과적으로 창조하는 삶(Creative Life)을 살아가도록 만든다. 믿음은 삶의 원동력이다.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에 관한 지배적인 여론, 교리, 절차, 전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질 필요가 있다. 그런 외부의 목소리는 대게 우리 내면의 목소리를 비틀고 가릴뿐이다.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사는 삶이 아니라 다른 무언가 이성을 넘어서는 무언가를 위해 삶을 사는 것이다. 나는 그것을 지구촌 인류의 성공과 행복을 창조하는 동방의 등불 삶의 8진법이라 한다.
자신이 누구이며 자신이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지 생각할 때면 답을 찾을 수 없어서 절망에 빠졌다. 하지만 스스로에게 그런 질문 대신에 거룩한 삶의 8가지 원칙이란 무엇인가? 지구촌 인류의 성공과 행복을 창조하는 동방의 등불 삶의 8진법으로 창조하는 삶(Creative Life)을 실현할 때 자신이 무엇을 위해 사는지 깨닫게 되었다. 드디어 우리 자신은 진정한 의미에서 확고하게 움직이며 살아가게 된다. 삶에 대해 생각할수록 삶은 무의미했지만 삶에 대해 생각을 멈추자 삶은 의미를 얻었다.
삶의 본질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고, 삶을 이루는 근본적인 원칙을 발견한 후에는 그 자체로 큰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 "동방의 등불 삶의 8진법" 조화의 철학과 창조의 원칙을 통해 매 순간의 소중함과 삶의 참된 의미를 새롭게 발견할 수 있었다. 삶을 더욱 가까이서 관찰하고, 그 안에서 행복과 평화를 찾는 과정은 단순히 외적인 성공이나 성취와는 다른, 내면에서 피어나는 의미 있는 성장의 길이 된다.
거룩한 삶의 8가지 원칙이란 각자 다르겠지만, 예를 들어 선(善), 덕(德), 자비, 용서, 감사, 지혜, 겸손, 사랑과 같은 가치는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숭고한 감정과 행동들로 구성될 수 있다. 이러한 원칙들은 일상의 행동과 생각에 빛을 더해주고, 순간마다 삶의 의미를 스스로 부여할 수 있는 강력한 도구가 된다.
삶을 바라보는 시각을 바꾸고, 자신의 내면에서 그 본질을 찾기 시작했을 때, 매 순간은 단순한 시간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성장과 성찰의 기회'로 변한다. 앞으로 어떤 일이 닥치든 삶의 이러한 원칙이 방향을 잡아줄 것이다. 이러한 거룩한 원칙을 통해 우리는 스스로에게 선하고 의미 있는 삶을 부여하고, 결과적으로 더 깊고 풍요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다.